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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파(武當派)

by 취랑(醉郞) 2022. 7. 12.

 

무당파(武當派)

억울하게 소림사에서 나온 장삼봉이 세운 문파로 짧은 시간에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불가인 소림사와는 달리 도가쪽에 속하고 무공도 소림의 강맹한 무공과는 달리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고 특히 검법에 뛰어나다.

1. 무당의 소재지 무당은 산의 이름으로 호북성 균현에 위치해 있다.

남웅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하늘로 높이 솟아있고, 그 모양은 향로 같으며 사시사철 안개에 싸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형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균현 남쪽 이백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오악의 하나라 한다.

수경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당산은 산세가 수려해 봉우리가 향로 같으며 증수가 산기슭에서 발원된다."

무당산기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무당산의 둘레는 사,오백리. 많은 봉우리 중에 삼령이란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이십여리에 달하며 늘 흰구름에 싸여 있다.

해가 이곳에서 떠올라, 이곳에서 저물어 또한 일조산이라 한다.

하여 많은 참배자가 모여들며, 도관이 많이 세워져 있다."

여지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모두 72봉과 36암, 24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주봉. 일명 자소봉이라 한다."

삼재도회무당산도고에는 무당의 위치가 옛이름으로 적혀 있다.

"무당산은 양양부 균주성에 위치해 있다."

2. 무당산의 이름과 신화 형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일명 선실, 일명 태화라 한다.

수경주에 의하면, 무당산은 태화산, 혹은 삼상산, 혹은 선실이라 한다.

그외에도 무당산은 사라산, 태악, 대악으로도 불리워졌다.

무당산이란 이름은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 대오룡령응만수궁비에 의하면

"양한 균방 부근에 산이 있어 그 둘레가 팔백리에 달하니...산의 이름은 태화였다.

한데 원무신이 이 곳에서 득도하여 이름을 무당이라 고쳤다.

원무신이 아니면 이 산을 당할 수 없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명나라 때 유삼오가 쓴 무당산오룡령비에 의하면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원천지기의 신이 건원씨 때 정락국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이 되던 해, 그는 요마를 소탕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모의 곁을 떠났다.

하여 옥청자원군으로부터 무극상도를 전수받았다.

그후 바다를 건너 중원으로 돌아와 명산을 순례하던 중 어느날 한 산봉오리에 올랐다.

당시 그 산에는 자소면양이란 요귀가 기거하고 있었으니 원천지기의 신은

검은 낙타의 뿔로 만든 검으로 요귀를 죽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

그 산이 바로 무당산이다."

원나라 성거천의 대천일진경만수궁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산봉우리의 최고봉은 남암이라 한다.

암앞에 동굴이 두개 있으니... 이름하여 대안황애와 천연정극풍천이라 한다.

위로는 뜬 구름 아래로는 가파른 절벽. 원숭이가 떼지어 살며 야수들이 우굴거린다.

사람은 이곳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기 어렵다.

그런데 용한년대 허위지정이 내려와 사람으로 둔갑하여 이 산에서 수도를 했다.

도를 터득한 후 그는 용을 타고 승천하였으니 원무지신이라 한다."

이러한 신화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원나라 사람 식자홀이 그 전설의 허구를 파해쳤다.

그가 저술한 무당사적서에 의하면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균주성에 부임했다.

무당산이 복지라는 것을 일찍이 전해 들은 것이 있어 전설에 대한 사실을 파헤쳐 나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애기가 제각기 달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3. 무당 기공의 종류 무술적 기공의 단련법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숭산의 소림사와 태극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무당파의 기공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당파의 기공, 즉 무당공은 무당도인 서본선의 라는 책에 그 종류와 연공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천화포접공, 구궁장공, 건곤구공, 야행술공, 현무공, 유골공, 연경공, 차장공, 태극구공, 면장공 등이 기록되어 있다.

1)천화포접공 : 천화포접공은 무당산 자소궁의 구궁팔괘문에 속하는 단련법의 하나로 이 기공의 목적은 전진, 후진, 도약력 등의 운동능력과 기술을 계속익히는 경우에 훈련한다.

2)구궁장공 : 구궁장공은 아홉개의 벽돌을 사용해 몸의 움직임의 민첩성과 발의 안정성을 기르기 위해 사용하는 기공법이다.

3)건곤구공 : 건곤구공은 주로 눈의 힘과 발놀림을 키우기 위한 기공법이다. 익숙해지면 날 듯이 달리며, 적의 품으로 자유자재로 잠입하는 경공의 기술을 간단히 할 수 있게 된다. 연공방법은 약 600그램 정도의 돌이나 철구를 사용해 한손으로 공중으로 던지고, 다른 손으로는 잡는 연습을 한 후 익숙해지면 양발에 모래주머니나 철추를 매달고 급격한 산길이나 비탈길을 오르며 던지고 잡는 연습을 한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원숭이처럼 가볍고 묘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4)야행술 : 공유신공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밤중의 활동능력을 기르기 위한 기공법이다.

5)태극구공 : 이 기공을 연습하려면 적당한 범위 내에서 여러가지 목제로 만든 공을 준비한 후 마보(마보)를 취한뒤, 양손바닥으로 이 공 하나를 잡고 회전시켜 상하, 좌우 방향으로 잡아 들어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동작은 어디까지나 천천히, 몸은 절대로 흔들거려서는 않된다. 는 다리에서 발생하여, 허리를 통해 단전으로 순환시켜 간다. 하나의 나무공으로 200회 정도 수련하면 점차 목구에서 석구, 철구 등의 무거운 것으로 바꾸어 연습한다. 이것이 능숙해지면 연습자의 손에는 끈기가 생겨 일단 잡힌 상대는 절대로 이쪽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6)면장공 : 이 기공은 무당파 기공 중 가장 중요한 단련법의 하나이다. 단련방법은 세수공이라는 기공법을 사용해 전신으로 기가 와 닿는 것처럼 훈련하고 그 것이 가능해지면 높이 1.5m 가로 3m 정도의 벽돌을 2열로 늘어세운 벽이 있는 곳에서 단련을 한다. 단련자는 이앞에서 세수공을 행해 기가 가득한지 가늠해보고, 양손바닥으로 동시에 이 벽을 친다. 이 벽을 박살낼 수 있게 되면, 이번에는 이 벽위에 목화로 만든 종이를 몇십장 붙이고 이 것을 찢어버리지 않고 벽을 쳐서 쓰러뜨리도록 단련해 간다. 손은 처음에는 양손을 같이 사용하지만 익숙해지면 한 손만으로도 똑같은 위력이 생길 때까지 단련해 간다.

7)태극기공 : 중국 무술의 한 종목목인 태극권은 원래가 기공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권법인지라 기를 기르고 단련하기에 적합한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태극권 수련을 양생에 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극권은 어디까지나 공수를 목적으로하는 무술이므로 건강법으로는 불필요한 동작도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래서 기공에 알맞은 동작만을 가려내어 배우기 쉬운 공법으로 재편한 것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을 "태극기공" 이라 부른다. 태극기공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중에서 이름있는 것으로는 임후성의 "태극기공 십팔식", 초극서의 "기공태극 십오세", 주염풍의 "기공태극 십삼세", 마예당의 "태극공" 등이 있다. 특히 "태극기공 십팔식"은 체조식으로 엮은 것이어서 여럿이 음악에 맞추어 연습하기 적합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태극기공회에 의해 제일 먼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와는 달리 동작중의 자세에 중점을 두는 '기공태극 십오세'도 주목할 공법으로서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4. 참고 사항 무당파(혹은 무당도)는 장삼봉이 세운 문파가 아니라 적어도 당나라 말기에는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교의 일파로서의 무당도는 원나라 말기에 전란에 의해서 거의 파괴되었다가 명나라 성조 영락제에 의해서 부흥되었다.

성조는 1412(영락 10)년 칙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당산은 천하의 명산이고 현천상제를 모시는 곳이라 도관이 있었는데 원말의 소란으로 모두 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즉위할 때 신명의 가호를 받았기때문에 무당산에 도관을 건립하여

태로 부처의 영을 위로함과 동시에 천하만민의 복을 기도하려 한다고...

성조는 삼십여 만명을 동원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玄天玉虛宮, 興聖五龍宮, 大聖南巖宮, 태현자소궁 등 네 도관을 건립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이 외에도 다섯개의 도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도관에는 많은 전답이 하사되고, 면세특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성조가 이런 일들을 한 것은 사실 무당도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저명한 도사였던 장삼봉을 자신의 측근에 두려 했다는 설이 있다.

확실히 장삼봉은 무당파와 관계가 있었고 벽곡에도 뛰어났기 때문에(즉 도력이 높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또 그가 무당파의 부흥에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성조는 호북성 방면의 인심을 사려 했던 것 같다.

무당파는 성조의 도관 건립에 의해 경제적 기초가 확립되고 동시에

도록사(당시 도교의 관리를 맡았던 관청)의 한 자리에 무당파의 도사가 임명되어

도교의 관리 행정면에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당파는 연단과 驅邪를 본령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영종 때부터는 환관이 무당산을 관리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이용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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