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를 뒤흔든 충돌: 이수스 전투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 번째 승리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은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의 승리로 서부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는 이 젊은 정복자를 저지하기 위해 1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나섰습니다. 곧 이수스의 좁은 해안 평야에서 양측의 군대가 충돌하며 고대 세계에 길이 남을 전투가 벌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전투 이전의 전략적 준비
그라니코스 강 전투(기원전 334년)에서의 승리는 알렉산드로스의 초기 원정에 큰 성공을 안겨줬습니다. 그러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여전히 엄청난 자원과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진군을 막아낼 역량이 충분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해군력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마케도니아의 원정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에페소스, 밀레투스, 할리카르나소스를 공략하여 페르시아 함대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그는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로 진격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르디움 매듭"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풀기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렸고, 이는 그의 결단력과 지도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습니다.
다리우스의 대응과 첫 만남
알렉산드로스 군이 타르수스에 주둔하고 있을 때, 다리우스가 바빌론에서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막기 위해 부사령관 파르메니온에게 이수스 지역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조치는 페르시아 지상군과 해군 간의 협력을 차단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예상보다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해 아르메니아 관문을 통해 이수스를 점령하며, 마케도니아 군의 부상병과 병사들을 처형했습니다. 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 군을 양분하여 각각 공격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와 파르메니온이 이미 병력을 합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군을 추격하며 후방에 강력한 적을 남겨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수스 전투의 배경과 준비
이수스 전투는 좁은 해안 평야와 피나로스 강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다리우스는 이곳을 전장으로 선택했지만, 지형은 그의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1~2km의 평야는 페르시아 군의 병력을 전면 배치하기에 너무 좁았으며, 기병의 기동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기병을 해안가에 배치해 마케도니아 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며, 중심에는 그리스 용병과 불사의 군단을 배치했습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중심에 사리사 창으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을, 양쪽 측면에는 기병대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군을 재정렬했습니다. 그는 우익을 직접 지휘하며, 파르메니온은 좌익을 책임졌습니다.
전투의 진행
기원전 333년 11월 5일 오후, 전투는 페르시아 기병이 피나로스 강을 건너 파르메니온의 부대를 공격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 보병은 강을 건너면서 화살 세례에 직면했지만, 뛰어난 훈련과 전열 유지를 통해 진격을 이어갔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의 정예 기병부대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페르시아 좌익을 공격하며 전투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에서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이 마케도니아 보병의 전열을 밀어붙이며 압박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기병 돌파로 인해 좌익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위치를 겨냥해 돌격하자 결국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그의 퇴각은 페르시아 군의 사기를 급격히 저하시켰고, 마케도니아 군은 이를 추격하며 대규모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약 2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마케도니아 군 역시 7천 명가량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전략적, 상징적으로 엄청난 의의를 지녔습니다.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 딸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로 인해 페르시아 왕실은 큰 굴욕을 당했습니다. 다리우스의 딸은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수스 전투는 페르시아 제국 역사상 왕이 전투에서 직접 패배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알렉산드로스가 시리아와 이후 페르시아 제국 내부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에 남은 교훈
이수스 전투는 단순히 숫자가 아닌 전략과 지형, 그리고 병사의 훈련이 승리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좁은 평야와 강변에서 펼쳐진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기민한 지휘력과 마케도니아 군의 높은 훈련도를 통해 대군을 격파한 명장면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 전투는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보여줄 더 위대한 승리들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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